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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내가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
스튜어트 B. 솔로몬 MetLife생명 회장이 쓴 한국인에 대한 제3국인으로서 평가를 여기 실어 봅니다.
나는 야간 통행금지 양담배 경찰가정 고부갈등을 경험했다.
한국이 40년간 그 많은 문제를 극복하는 것도 지켜 보았다.
평화를 지키고 경제를 키웠으며 가정의 변화에적응했다.
나는 한국의 미래를 낙관한다. 그 근거는 매우 개인적이고 사소한 경험이다. 나는 이 경이로운 나라에서 20년 넘게, 달리 말하면 인생의 3분의 1 이상 또는 성인기의 절반 이상을 살아왔다. 이런 사람의 시각과 경험에서 한국의 미래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 보는 것도 전혀 무익하 지는 않을 것이다.
1970년대엔 야간 통행금지가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외국인을 포함한 모든 주민이 자정까지는 귀가해야 하고 최소한 자정 이후에 거리를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통금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직전에 모두들 택시나 버스 막차를 타려고 안간힘을 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때 그 버스 차장들은 어떻게 그 빽빽한 만원 버스에 나를 구겨 넣었는 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나면 세상이 온통 정적뿐이었다.
나는 70년대 대부분을 부산에서 살았고, 남포동을 비롯한 시내의 술집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일이 간혹 있었다. 항구 도시인 부산의 술집은 바다와 뱃사람과 부산 사람들의 화끈한 성격이 어우러 져 항상 활기가 넘쳤다. 모두들 기분을 내려고 술집에 모였고, 항상 즐겁게 술을 마시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 즐거운 술자리가 파하면 남포동 근처의 아파트에 살던 필자는 버스를 타는 불편 없이 걸어서 바로 집에 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술자리가 자정을 넘겨 파했고, 필자는 집으로 걸어 가다 통행금지 위반으로 파출소에 잡히게 되었다. 다행히 첫 번째 위반 때에는 훈계만 듣고 훈방되었 지만, 두 번째 위반 때에는 그런 행운이 따르 지 않았다. 새벽 4시까지 파출소에 잡혀 있게 되었다.
다행히 파출소를 지키던 경찰관과는 당시 필자의 시원찮은 한국어 실력으로도 말이 잘 통해서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경찰관은 계속 필자에게 “담배 없느냐”고 물었는 데, 비흡연자인 필자에게 담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다음 날 한국인 동료,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항상 ‘양담배’ 한 갑을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들 했다. 특히 통금 시각이 지나서 집에 갈 때는 반드시, 대단히 ‘유익한’ 조언이었다.
한국은 40년 만에 이런 상황을 모두 극복했다. 지금 야간 통행금지가 없 지만 한국은 발전과 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북한과의 격차를 더욱 벌리고 있고, 크고 작은 사건이 있 지만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이 최선이라는 신념을 버리 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의 미래에 대단히 좋은 일이다.
70년대에 파출소를 지키던 경찰관은 양담배를 원했다. 당시엔 그 것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양담배는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니다. 수준 높은 소비자들이 세계적인 수준의 다양한 국내외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 한국의 산업과 서비스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세계 시장의 경쟁을 통해 앞으로 더욱 강해 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미래를 낙관한다.
1970년대 초 나는 서울에서 몇 년 동안 어느 일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 집에는 장남인 젊은 남편과 그 아내, 갓난아이, 가정부와 할머니(시어머니)가 함께 살았다. 이들은 모두 내가 잘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 지 않았다. 딱 한 가지가 문제였다. 그 ‘딱 한 가지’는 결혼한 가정에서 대부분 겪게 되는 일, 바로 고부(姑婦) 갈등이었다. 미국에 있는 나의 집에서도 어머니와 할머니 사이에 고부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같이 살았던 이 가족을 통해 고부갈등에 대처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충돌이 일어날 때면 이상하게도 그 남편이 보이 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남편이 중재를 해서 가정의 평화를 도모해야 하는 것 아닌 가? 나는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신경 끄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래 지 않아 평소보다 조금 크게 말다툼을 하던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내게 와서 잘잘못을 가려 달라고 하는 일이 생겼다. 갑자기 내 방에 두 사람이 들어 와서 판결(?)을 재촉하는 데, 한국에 온 지 1년 남짓밖에 안 된 나는 두 사람의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곤혹스럽 기 짝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다툼이 일어 날 때를 미리 정확히 감지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가진 남편의 신호를 받아 전투가 벌어지 기 전에 재빨리 남편의 뒤를 따라 전장(戰場)을 빠져 나올 수 있었고, 근처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전투가 끝난 후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한국 가족은 그동안 많은 것들이 변했다. 40년 전 내가 보았던 대가족은 많이 줄었다. 의료비, 교육비 부담이 커지고 있고, 수명은 훨씬 길어 지고 있고, 자녀는 예전보다 덜 낳고 있고, 불확실한 수입원에 기대어 오랜 노후를 보내야 하는 현실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가족을 지키는 지혜, 가족을 중시하는 마음, 어른을 공경하는 태도는 여전히 튼튼하다. 한국은 가족 환경의 급속한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다. 이러니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 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 글은 필자가 영문으로 쓴 것을 회사 보좌진이 번역한 것입니다.)
조선일보 4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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