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중앙SUNDAY 남윤호 편집국장은 이번 정책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하였습니다. 참석 후 독자들에게 보내는 편집국장 레터 10월 3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정책토론회를 소개하였습니다.
VIP 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남윤호입니다.
“니는 다른 뻘갱이들 하곤 마이 다르네.”
한 야당 정치인이 소위 TK 본바닥 유권자에게 들었다는 말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묵념하자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그런 말을 건네더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이념적 낙인 효과는 아직도 그처럼 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층은 다릅니다. 2일 이념과 갈등을 주제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젊은 토론자가 이렇게 반문하더군요.
“상식이 된 가치를 두고 정치권이 왜 갈등을 확대하는 겁니까.”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안보는 당연히 지켜야 할 과제가 됐는데도 안보를 강화하자면 보수, 북한과 대화하자면 진보라고 낙인찍는 풍토가 있다며 야유하더군요. 내 편 네 편을 나눈 뒤 모든 사안을 거기에 꿰맞춰 편가르기를 한다는 것이지요.
자, 어떻습니까. 보수와 진보를 화학 실험실에서처럼 명쾌히 나눌 리트머스 시험지는 과연 존재하는 걸까요. 새정치연합은 진보요, 새누리당은 보수입니까. 세월호특별법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넣으면 진보요, 빼면 보수입니까. 그 잣대에 논리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이성적으로 되돌아볼 때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주관적인 이념성향과 실제 하는 언동은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주변에선 북한에 대한 단호한 대처를 촉구하면서, 경제 얘기를 할 땐 대기업 규제를 강화하자는 분을 수월찮게 봅니다. 안보에선 보수, 경제에선 진보가 한 사람의 의식에 공존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반대도 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는 또 어떻습니까. 한일 관계를 개선하자는 의견은 보수층에서 더 많은 듯합니다. 진보 특유의 인터내셔널리즘은 다 어디 갔습니까.
우리만 그런 건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 정치문화 연구가 한창일 때 이런 면접조사 결과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이념을 신봉하십니까?”
“그야 물론 자유민주주의요.”
“그럼 선생님의 자녀가 흑인과 함께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는 걸 수용하겠습니까?”
“그건 곤란하지. 우리 애들을 어떻게….”
“공공 도서관에서 마르크스-레닌의 책을 볼 수 있게 하는 데엔 어떤 입장이십니까?”
“절대 안돼. 그런 불온서적을….”
추상적 가치로서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지만, 실제 행동과 의식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런 이중성을 단순히 개인의 정신분열증으로 몰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중성을 보이곤 합니다. 우리 국회의원들도 그렇습니다. 머리로만 보수 또는 진보라고 생각할 뿐 실제 법안을 만드는 걸 보면 대개 비슷한 중도로 수렴한다는 조사가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념이란 정체성이나 지켜야 할 가치라기보다 싸움의 명분이자 허위의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언론사 역시 이념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하라는 질책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대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어느 언론사에 들어가 일하고 싶냐고요. 예상대로 다들 “붙는 데 가야죠”라고 하더군요. 이어 여러 명이 “이념의 양극단에서 대립하고 있는 곳은 되도록 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합리적 반응 아닙니까. 이젠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극단으로 내달리는 언론사들은 장기적으로 우수인재 구하기가 어려워질 겁니다. 냉정한 시장의 선택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